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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1 (새 문서) | 1 | [[분류:루이나]][[분류:루이나의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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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2><tablealign=right><tablewidth=400><tablebordercolor=#c8102e,#c8102e><tablebgcolor=#fff,#1f2023><bgcolor=#c8102e,#c8102e><height=100> [[파일:루이나 노동당 로고.png|width=330]] || | |
| 4 | ||<-2><bgcolor=#c8102e,#c8102e> {{{#fff '''Labour Party of Ruina'''[br]{{{-1 Лейбористская партия Руины}}}}}} || | |
| 5 | ||<width=125><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c8102e,#ff6b6b> '''한국어 명칭''' ||노동당 || | |
| 6 | || '''약칭''' ||노동당 (LPR) || | |
| 7 | || '''창당일''' ||1919년 3월 16일[* 윈덴브뤼크 시립 직업회관에서 창당대회를 열었다.] || | |
| 8 | || '''해산일''' ||1948년 2월 8일[* 해산이 아니라 신설 합당이다. 당의 자산·당원·지구당 조직은 전부 사회민주당으로 승계되었다.] || | |
| 9 | || '''전신''' ||노동자대표위원회 {{{-2 (1906~1919)}}} || | |
| 10 | || '''후신''' ||[[사회민주당(루이나)|사회민주당]] || | |
| 11 | || '''중앙당사''' ||[[루이나]] [[벨포르 특별시]][br]벨포르 노동회관 {{{-2 (1927~1948)}}} || | |
| r2 | 12 | || '''이념''' ||민주사회주의 |
| 13 | 노동조합주의 | |
| 14 | 사회보수주의 | |
| 15 | ----[br] | |
| 16 | '''내부 계파:''' | |
| 17 | • 산업국유화파 | |
| 18 | • 조합주의 실무파 | |
| 19 | • 반제국주의 좌파 || | |
| r1 (새 문서) | 20 | || '''정치적 스펙트럼''' ||좌파 || |
| 21 | || '''초대 당수''' ||아널드 헤이스팅스 || | |
| 22 | || '''마지막 당수''' ||이디스 콜브룩 || | |
| 23 | || '''역대 최다 의석''' ||하원 121석 {{{-2 (1944년)}}}[br]상원 19석 {{{-2 (1944년)}}} || | |
| 24 | || '''역대 최고 득표율''' ||21.6% {{{-2 (1932년 대통령 선거)}}} || | |
| 25 | ||<|2> '''당색''' ||{{{#!wiki style="display: inline; border-radius: 2px; padding: 3px 4px; background: #c8102e; font-size: .9em" | |
| 26 | {{{#ffffff '''붉은색''' (#c8102e)}}}}}} || | |
| 27 | ||{{{#!wiki style="display: inline; border-radius: 2px; padding: 3px 4px; background: #7a1420; font-size: .9em" | |
| 28 | {{{#ffffff '''적갈색''' (#7a1420)}}}}}} || | |
| 29 | || '''당원 수''' ||1,182,400명 ^^(1947년, 해산 직전)^^ || | |
| 30 | || '''상징''' ||붉은 깃발, 닻과 톱니바퀴 || | |
| 31 | ||
| 32 | [목차] | |
| 33 | [clearfix] | |
| 34 | == 개요 == | |
| 35 | 노동당(Labour Party of Ruina)은 1919년부터 1948년까지 존속했던 [[루이나]]의 좌파 정당이다. [[사회민주당(루이나)|사회민주당]]의 두 전신 가운데 하나로, 1948년 2월 8일 공화진보회와 신설 합당하면서 소멸했다. | |
| 36 | ||
| 37 | 항만·철도 노동조합의 정치 대표 기구였던 노동자대표위원회를 모체로 창당되었으며, 존속 기간 내내 단 한 번도 집권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노동당은 루이나에 산업별 노동조합의 정치 참여라는 경로를 처음으로 열었고, 8시간 노동제, 산재보상, 실업보험, 공공임대주택 같은 의제를 제도권 논쟁의 대상으로 끌어올린 정당으로 평가된다. 현재 루이나 복지제도의 상당 부분은 노동당이 야당 시절 발의해 부결시켰다가, 훗날 사회민주당이 다시 꺼내 관철한 법안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 |
| 38 | ||
| 39 | 동시에 노동당은 루이나 좌파의 구조적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결선투표가 없는 대통령제에서 좌파 표가 갈릴 때 필패한다는 경험이 반복되었고, 이 학습이 1948년 합당으로 이어졌다. | |
| 40 | ||
| 41 | == 상징 == | |
| 42 | === 붉은 깃발과 닻 === | |
| 43 | 노동당의 공식 표장은 닻에 톱니바퀴를 겹친 도안이었다. 창당 세력의 두 축이 항만노조와 철도·기계공노조였던 사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해양 제국의 부두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내륙 공업지대의 노동자를 하나의 도안에 넣겠다는 의도였다. | |
| 44 | ||
| 45 | 당기는 붉은 바탕에 흰색 닻과 톱니바퀴를 배치한 형태였고, 대중 집회에서는 도안 없는 붉은 깃발만 쓰는 경우가 더 많았다. 1926년 [[윈덴브뤼크 철도 파업]] 이후 붉은 깃발이 사실상 노동당 자체를 가리키는 기호로 굳어졌으며, 반대 진영에서는 이를 근거로 노동당을 국제 공산주의와 동일시하는 공세를 폈다. | |
| 46 | ||
| 47 | 한편 오늘날 사회민주당의 상징인 부엉이는 노동당의 표장이 아니었다. 부엉이는 노동당이 1927년 중앙당사로 사들인 벨포르 노동회관 건물의 장식이었다. 이 건물은 원래 1878년에 세워진 야간 노동자 학교였고, 부엉이 석조는 그 학교의 표식이었다. 1948년 합당대회가 이 건물에서 열리면서 신당이 건물의 부엉이를 그대로 당의 표장으로 채택했고, 그 결과 노동당의 닻은 계승되지 않았다. | |
| 48 | ||
| 49 | === 당색 === | |
| 50 | 당색은 붉은색(#c8102e)이었다. 창당 이래 해산까지 한 번도 바뀌지 않았고, 이는 노동당이 국제 노동운동의 상징 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였음을 뜻한다. | |
| 51 | ||
| 52 | 이 붉은색은 합당 이후에도 5년간 사회민주당의 당색으로 유지되었으나, 냉전 초기의 색채 공세가 거세지자 1953년 사회민주당 전국위원회 결정으로 청색 계열로 교체되었다. 구 노동당계 당원들은 이 결정을 강하게 반대했고, 일부는 탈당했다. 오늘날에도 사회민주당 내 좌파 계파 행사에서 붉은 깃발이 등장하는 것은 이 시기의 잔영이다. | |
| 53 | ||
| 54 | == 성향 == | |
| 55 | 노동당은 산업 국유화와 완전고용을 강령의 중심에 둔 민주사회주의 정당이었다. 기간산업, 특히 철도·항만·석탄·전력의 국가 소유를 일관되게 주장했고,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을 헌법적 권리로 규정할 것을 요구했다. | |
| 56 | ||
| 57 | 반면 사회문화적 의제에서는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당의 조직 기반이 종교적·지역적 결속이 강한 산업 도시의 조합원 가정이었기 때문에, 가족제도, 음주 규제, 종교 교육 문제에서 노동당은 오히려 민주공화당보다 완고한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의 유급 노동 참여에 대해서도 당내 다수는 "가장의 임금을 지킨다"는 논리로 소극적이었으며, 이 문제는 1930년대 내내 당내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 |
| 58 | ||
| 59 | 제국 문제에서는 당이 끝내 하나의 입장을 만들지 못했다. 반제국주의 좌파는 해외 영토의 자치와 조속한 철수를 주장한 반면, 항만·조선 노조를 기반으로 한 다수파는 제국 무역이 곧 조합원의 일자리라는 이유로 특혜관세 체제 유지를 지지했다. 이 분열은 노동당이 식민지 출신 이주 노동자 문제에 일관된 태도를 취하지 못한 배경이기도 하다. | |
| 60 | ||
| 61 | 계파는 크게 셋으로 나뉘었다. 강령의 국유화 조항을 문자 그대로 관철하려는 산업국유화파, 임금·노동시간 같은 실무 성과를 우선한 조합주의 실무파, 그리고 제국 해체와 국제 연대를 앞세운 반제국주의 좌파였다. 대체로 실무파가 당권을 쥐었고, 국유화파는 강령을, 좌파는 청년·학생 조직을 장악하는 구도가 오래 유지되었다. | |
| 62 | ||
| 63 | == 역사 == | |
| 64 | === 전사 === | |
| 65 | 루이나에서 노동조합의 전국 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1889년이다. 이 시기의 노조는 정당을 만들기보다 기존 정당의 후보를 선별 지지하는 방식을 택했으나, 산업재해와 장시간 노동에 대한 입법이 번번이 좌초되면서 독자 정치세력화 요구가 커졌다. | |
| 66 | ||
| 67 | 1906년 항만·철도·기계공 노조와 소규모 사회주의 단체들이 노동자대표위원회를 결성했다. 위원회는 정당이 아니라 선거 연합체였고, 하원에서 최대 14석까지 확보했으나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지는 못했다. | |
| 68 | ||
| 69 | === 창당과 초기 (1919~1928) === | |
| 70 | 전후 보통선거권 확대와 함께 노동자대표위원회는 1919년 3월 16일 윈덴브뤼크에서 정식 정당으로 전환했다. 초대 당수는 항만노조 위원장 출신의 아널드 헤이스팅스였다. | |
| 71 | ||
| 72 | 1920년대의 노동당은 원내 제3당에 머물렀다. 그러나 1926년 [[윈덴브뤼크 철도 파업]]에서 당이 파업 지도부를 전면 옹호하면서, 노동당은 처음으로 전국적 정치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파업은 진압되었고 당은 "국가 기능을 볼모로 잡는 정당"이라는 낙인을 얻었지만, 동시에 산업 도시에서 조직 기반을 급격히 확대했다. 당원 수는 파업 전 18만 명에서 1928년 62만 명으로 늘었다. | |
| 73 | ||
| 74 | 1927년 당은 벨포르 구시가의 옛 야간학교 건물을 사들여 중앙당사로 삼고 벨포르 노동회관이라 명명했다. 1928년 대통령 선거에는 창당 후 처음으로 후보를 냈으나 득표율 11.2%로 3위에 그쳤다. | |
| 75 | ||
| 76 | === 대공황과 분열 (1929~1936) === | |
| 77 | 대공황은 노동당에 기회이자 재앙이었다. 실업률이 치솟으면서 1932년 대선에서 당수 윌리엄 T. 무어는 21.6%를 득표해 당 역사상 최고 성적을 냈고, 같은 해 하원 88석을 확보했다. | |
| 78 | ||
| 79 | 그러나 결정적 변수는 [[러더퍼트 J. 헤이슬러]] 대통령이었다. 헤이슬러는 노동당이 십수 년간 주장해온 공공사업, 실업보험, 은행 규제를 대통령 권한으로 먼저 실행했고, 이는 노동당의 정책 공간을 통째로 잠식했다. 당내에서는 "우리 강령을 남이 집행하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라는 물음이 반복되었다. | |
| 80 | ||
| 81 | 1933년 9월, 헤이슬러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며 거국내각을 구성하고 무어를 [[루이나 국무총리|국무총리]]로 지명했다. 무어는 당의 사전 승인 없이 이를 수락했고, 전국위원회는 그를 제명했다. 무어와 그를 따른 하원의원 21명은 국민노동당을 창당해 헤이슬러 행정부에 잔류했다. | |
| 82 | ||
| 83 | 이 분당은 노동당에 치명적이었다. 대공황이라는 최적의 조건에서 당은 오히려 후퇴했고, 1936년 대선에서는 14.3%로 3위까지 밀렸다. 새 당수 데즈먼드 A. 파울러는 강령의 국유화 조항을 유지하되 "우선순위 목록"을 도입해 실현 가능한 요구부터 관철하는 노선을 택했다. | |
| 84 | ||
| 85 | === 전시 연립과 재기 (1937~1944) === | |
| 86 | 1940년부터 1941년까지 이어진 고립 항전기에 노동당은 전시 연립 정부에 참여했다. 파울러는 노동력 동원과 배급 행정을 담당했고, 당은 이 기간 동안 처음으로 국정 운영 능력을 대중에게 입증했다. 전시 임금 통제의 대가로 사업장 단위 노사협의회를 법제화한 것은 이 시기 노동당의 최대 성과로 꼽힌다. | |
| 87 | ||
| 88 | 1941년 당수직을 이어받은 그레고리 P. 실링은 전후 재건 구상을 선점하는 데 집중했다. 1943년 당이 발표한 「재건 백서」는 전 국민 의료보장, 대규모 공공임대주택 공급, 완전고용 목표를 담고 있었고, 이 문서는 훗날 사회민주당 초기 정책의 원안이 되었다. | |
| 89 | ||
| 90 | 1944년 선거에서 노동당은 하원 121석, 상원 19석으로 당 역사상 최다 의석을 얻었다. 그러나 같은 해 대통령 선거에서는 19.8%로 3위에 머물렀다. 공화진보회 후보가 12%대를 가져가면서 반보수 표가 갈린 결과였고, 두 당의 득표를 합쳐도 민주공화당을 넘지 못했다는 사실이 당내에 깊은 좌절을 남겼다. | |
| 91 | ||
| 92 | === 합당과 해산 (1945~1948) === | |
| 93 | 1945년 당수가 된 이디스 콜브룩은 루이나 정당사 최초의 여성 당수였다. 그는 취임 직후부터 공화진보회와의 통합을 당의 유일한 활로로 규정하고 협상을 주도했다. | |
| 94 | ||
| 95 | 통합은 순탄하지 않았다. 산업국유화파는 자유주의 세력과의 합당이 강령의 포기라며 반발했고, 공화진보회 측은 노동조합의 당내 블록 투표권을 문제 삼았다. 협상은 세 차례 결렬되었다가, 결국 강령에서 국유화 대상을 기간산업으로 한정하고 노조 블록 투표를 단계적으로 축소하는 절충안으로 타결되었다. | |
| 96 | ||
| 97 | 1948년 2월 8일 벨포르 노동회관에서 열린 합당대회에서 노동당과 공화진보회는 해산을 결의하고 [[사회민주당(루이나)|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창당 선언문의 첫 문장인 "노동의 대표와 시민의 대표를 한 정당 안에 둔다"는 표현은 이 절충의 성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콜브룩은 신당의 초대 부대표를 맡았다. | |
| 98 | ||
| 99 | 합당이 실제 집권으로 이어진 것은 [[벨포르의 봄]] 이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좌파 단일 정당이라는 구도 자체는 이때 확립되어, 이후 루이나 정치는 사회민주당과 [[민주공화당(루이나)|민주공화당]]의 양당 경쟁으로 고정되었다. | |
| 100 | ||
| 101 | == 지지 기반 == | |
| 102 | 노동당의 지지 기반은 조직 노동자와 그 가족에 사실상 한정되어 있었다. 철도 분기점과 조차장이 밀집한 윈덴브뤼크 공업지대, 항만 하역 노동자가 집중된 [[롱비치]]와 사보레 부두 지역, 석탄·철강 도시였던 오보레 북부가 당의 3대 아성이었다. | |
| 103 | ||
| 104 | 반면 농촌과 소도시에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 소작농과 자영농은 국유화 강령을 자기 토지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고, 노동당은 끝내 농업 강령을 정비하지 못했다. 도시 중산층과 전문직에서도 지지가 미미했는데, 이 계층은 훗날 공화진보회를 거쳐 사회민주당에 합류하게 된다. | |
| 105 | ||
| 106 | 여성 유권자층에서의 부진은 당의 만성적 약점이었다. 남성 가장의 임금을 방어하는 데 초점을 맞춘 정책 기조가 여성 노동자에게 호소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며, 1945년 콜브룩의 당수 선출은 이 문제에 대한 뒤늦은 대응이기도 했다. | |
| 107 | ||
| 108 | == 역대 당수 == | |
| 109 | ||<tablebordercolor=#c8102e><tablebgcolor=#fff,#1f2023><rowbgcolor=#c8102e><rowcolor=#fff> 대수 || 이름 || 재임 || 비고 || | |
| 110 | || 초대 || 아널드 헤이스팅스 || 1919~1928 || 항만노조 위원장 출신 || | |
| 111 | || 제2대 || 윌리엄 T. 무어 || 1928~1933 || 국무총리 취임 후 제명 || | |
| 112 | || 제3대 || 데즈먼드 A. 파울러 || 1933~1941 || 전시 연립 참여 || | |
| 113 | || 제4대 || 그레고리 P. 실링 || 1941~1945 || 「재건 백서」 발표 || | |
| 114 | || 제5대 || 이디스 콜브룩 || 1945~1948 || 최초의 여성 당수, 합당 주도 || | |
| 115 | ||
| 116 | == 역대 선거 결과 == | |
| 117 | === 대통령 선거 === | |
| 118 | ||<tablebordercolor=#c8102e><tablebgcolor=#fff,#1f2023><rowbgcolor=#c8102e><rowcolor=#fff> 연도 || 후보 || 득표율 || 결과 || | |
| 119 | || 1928 || 아널드 헤이스팅스 || 11.2% || 3위 || | |
| 120 | || 1932 || 윌리엄 T. 무어 || 21.6% || 2위 || | |
| 121 | || 1936 || 데즈먼드 A. 파울러 || 14.3% || 3위 || | |
| 122 | || 1940 || 데즈먼드 A. 파울러 || 17.9% || 2위 || | |
| 123 | || 1944 || 그레고리 P. 실링 || 19.8% || 3위 || | |
| 124 | ||
| 125 | === 의회 선거 === | |
| 126 | ||<tablebordercolor=#c8102e><tablebgcolor=#fff,#1f2023><rowbgcolor=#c8102e><rowcolor=#fff> 연도 || 상원 || 하원 || 지위 || | |
| 127 | || 1920 || 3석 || 29석 || 제3당 || | |
| 128 | || 1924 || 5석 || 38석 || 제3당 || | |
| 129 | || 1928 || 7석 || 47석 || 제3당 || | |
| 130 | || 1932 || 12석 || 88석 || 제2당 || | |
| 131 | || 1936 || 8석 || 61석 || 제3당 || | |
| 132 | || 1940 || 11석 || 79석 || 제3당 || | |
| 133 | || 1944 || 19석 || 121석 || 제2당 || | |
| 134 | ||
| 135 | == 평가 == | |
| 136 | 노동당에 대한 평가는 "집권하지 못한 채 의제만 남긴 정당"이라는 문장으로 요약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당은 29년의 존속 기간 동안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했고 원내 과반에도 근접하지 못했다. | |
| 137 | ||
| 138 | 그러나 사회민주당 계열은 노동당을 실패한 정당으로 보지 않는다. 오늘날 루이나 복지제도의 핵심 골격인 전 국민 의료보장과 대규모 공공임대주택 공급은 모두 1943년 「재건 백서」에 이미 명시되어 있었고, 사업장 노사협의회는 노동당이 전시에 직접 관철한 제도로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
| 139 | ||
| 140 | 비판적 평가도 있다. 사회문화적 보수성과 제국 문제에서의 침묵은 당이 노동조합 이익집단의 정치 대리인에 머물렀음을 보여준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1933년 분당 역시 지도부가 당 조직보다 개인의 국정 참여를 앞세운 결과로 해석되며, 이후 루이나 좌파가 "지도부의 독자 행동"을 극도로 경계하게 만든 원체험으로 자주 인용된다. | |
| 141 | ||
| 142 | == 여담 == | |
| 143 | * 노동당 당원증은 붉은 표지에 닻 도안이 금박으로 찍혀 있었다. 합당 후에도 이를 보관한 당원이 많아, 사회민주당 창당 초기에는 두 종류의 당원증이 함께 유통되었다. | |
| 144 | * 당가 「부두에서 광산까지」는 합당 이후 공식적으로는 쓰이지 않지만, 사회민주당 좌파 계파 행사에서는 지금도 불린다. | |
| 145 | * 윌리엄 T. 무어가 만든 국민노동당은 1945년 해산해 [[민주공화당(루이나)|민주공화당]]에 흡수되었다. 루이나 정치사에서 좌파 분당의 결말을 보여주는 사례로 교과서에 실려 있다. | |
| 146 | * 이디스 콜브룩은 여성 당수였음에도 여성 참정권 운동과 거리를 두었던 인물로, 이 점 때문에 당대와 후대의 평가가 크게 갈린다. | |
| 147 | * 벨포르 노동회관은 현재까지도 사회민주당 중앙당사로 쓰이며, 건물 정면의 부엉이 석조는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 |
| 148 | ||
| 149 | == 관련 문서 == | |
| 150 | * [[사회민주당(루이나)]] | |
| 151 | * [[민주공화당(루이나)]] | |
| 152 | * [[윈덴브뤼크 철도 파업]] | |
| 153 | * [[러더퍼트 J. 헤이슬러]] | |
| 154 | * [[루이나 의회]] | |
| 155 | ||
| 156 | == 둘러보기 == | |
| 157 | [include(틀:루이나의 정당)] |